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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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40) 제19호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보유자는 1934년 인천시 강화군에서 태어났다. 어업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따라 어업과 관련한 민요를 듣고 부르며 예술적인 재능을 키우다가 한국전쟁 이후 이창배의 청구고전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에 입문하였다. 타고난 감각으로 민요를 배우고 가르치며 전국적인 공연활동과 방송 출연, 다양한 공연 연출에서 활약하다 2009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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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9) 제26호 영산줄다리기 김종곤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산줄다리기 김종곤 명예보유자는 1938년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으나 어려운 형편에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기술자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후 파월 기술자로 베트남 전쟁을 겪고 돌아와 농사에 전념하는 농사꾼이자 영산의 대동놀이인 영산줄다리기를 지키고 전승하는 줄꾼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국가무형문화재 제26호 영산줄다리기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2008년에 명예보유자가 되어 한국과 동아시아의 줄다리기를 꾸준히 기록하고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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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8) 제80호 자수장 최유현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자수장 최유현 보유자는 193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후 17세에 자수에 대한 일념으로 스승을 따라 부산으로 이주하여 자수 교육과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이후 최유현 수예학원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한국문화를 담은 자수를 연구, 제작하여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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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7) 제47호 궁시장 유영기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궁시장 유영기 보유자는 1935년 경기도 장단군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화살 만드는 일을 하던 집안에서 나고 자라 자연스레 어릴 때부터 화살을 만들었고, 꾸준히 화살 제작에 몰두하여 1996년 국가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8년부터는 전통 화살 복원에 힘을 쏟았으며 2000년에 영집 궁시박물관을 개관하여 전통 화살을 알리는 한편 화살 제작의 전승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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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6) 제93호 전통장 김동학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통장 김동학 보유자는 1931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조들로 인해 가난한 시절을 보내며 방황도 했지만 부친의 일을 도와 전통(箭筒)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되었고, 1989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93호 전통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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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5) 제108호 목조각장 전기만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가 기·예능을 체득하기까지의 삶과 활동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인간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전승자의 생애와 무형문화재 전승과정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 발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목조각장 전기만 보유자는 1929년 황해도 벽성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조각의 꿈을 키우며 미술학교에 진학했지만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포로생활과, 가족들과의 이별을 겪었다. 그러나 어려움을 딛고 꾸준히 목조각, 특히 불교 조각에 몰두하여 2001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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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4) 제82-3호 위도띠뱃놀이 김상원
    김상원(金相元)은 1933년 7월 1일에 부친 김장옥과 모친 강양임 사이에서 4남 2녀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16살에 영광 법성포에 있는 법성실업고등중학교에 입학했다. 예전부터 위도와 법성포는 교류가 많던 곳이어서 그곳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지인의 소개로 법성포에 하숙집을 구해 생활했다. 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위도로 돌아간 뒤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기의 위도는 육지만큼 혼란스럽지 않은 상태였고 장남이기도 해서 19살에 집안에서 주선한 두 살 연하의 신부 신정염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이듬해에 큰 딸을 낳고 3년 후에는 큰 아들을 낳았으며, 총 6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23세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대구에서 군생활을 했다. 제대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다가, 지인이 운영하던 전주 이서면 농장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29세에는 부모의 집에서 독립해서 3칸짜리 집을 새로 지었으며 30대에는 배를 새로 짓고 낭장망 어업을 했다. 김상원이 띠뱃놀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춘천에서 있었던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부터였다. 당시 조금례 무녀가 굿을 하고 그가 징을 쳤는데, 위도띠뱃놀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비중 있는 역할로 자리잡게 되었다. 위도띠뱃놀이는 1985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상원은 1988년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고, 1995년에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김상원은 중학교 유학 시절, 군입대, 전주 농장에서 일하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위도에서 살았다. 그는 고향에서 살면서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나 민속놀이를 주민들과 공유하며 전승해 왔다. 또한 무속에 관심이 많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무녀들이 굿을 할 때 장구 반주를 하기도 했으며, 특히 원당제를 모실 때에는 주민 중에서 소질이 있는 사람이 무녀의 굿 반주를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숙지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위도의 전통적인 생업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 위도띠뱃놀이 전수교육조교에 이어 보유자가 되면서 관련 예능을 정리해서 기록을 남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축문을 비롯해서 조금례 무녀를 통해 파악한 무가 사설을 정리해서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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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3) 제68호 밀양백중놀이 권경도
    권경도(權慶道)는 1920년 음력 5월 25일 안동 권씨와 월성 이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밀양시 내이동 ‘동가리 신작로’라 불렸던 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신 터라 딸을 엄혹하게 키운 반면, 아버지는 권경도를 무척 귀여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권경도를 업고 밀양장에 데려 갔다. 그때 마침 지동이란 곳에 살던 난쟁이가 걸어갔는데, 옆구리에 낀 삿갓이 땅에 끌릴 정도로 키가 작았다. 이 광경을 본 권경도는 ‘지동 난쟁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아장아장 걷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난쟁이를 따라 흉내낼 만큼 신명과 해학이 넘쳐났다. 작은 오빠인 권재업은 밀양에서 북 치는 가락이 좋기로 소문이 났고, 춤도 아주 잘 추던 사람이었다. 권경도보다 앞서 밀양백중놀이 전신인 오삼친목계 일원이기도 하였다. 권경도는 스무 살에 결혼했지만, 남편이 일찍 떠나갔다. 이내 찾아온 고달팠던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라곤 ‘곡깨이’(익살)를 부리면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정도였다. 1960~70년대는 동네 야유회가 빈번하게 있었다. 영남루 근처 솔밭에서 야유회 하면서 권경도가 곱사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오빠 권재업이 한국국악협회 밀양지부 회원으로 가입시키게 되면서 밀양백중놀이와 본격적인 연을 맺게 되었다. 권경도는 한국국악협회 밀양지부 회원으로 가입해서 처음에는 곱사춤을 추었다가 난쟁이춤으로 종목을 바꾸었다. 1980년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준비를 하기 위해 회원들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3개월 동안 아주 열심히 하였다. 이 해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제주도에서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공연 연습하던 중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긴장과 피로가 겹친 탓이었다. 몸이 몹시 힘들었지만 회원들과 함께 고생한 성과를 봐야 하기에 공연은 무사히 마쳤다. 회원들은 오랜 연습과 노력을 했기 때문에 밀양백중놀이가 1등을 하리라 예상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제주도에서 삼베를 떠서 밀양백중놀이 깃발을 만들었다. 보존회에서는 그 깃발을 아직 사용하고 있다. 밀양백중놀이 병신춤은 종류가 열 가지나 된다. 난쟁이, 중풍쟁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곱사, 히줄래기, 봉사, 절름발이춤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난쟁이춤은 가슴과 날개 죽지를 열어젖히고 어깨를 올려서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어서 추는 춤이다. 권경도는 익살과 해학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밀양백중놀이를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전수회관을 짓기 위해 전국으로 다니면서 공연도 했었고, 보존회에서 요청하는 공연소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탁월한 춤 기량에다가 밀양백중놀이를 향한 열정이 바탕이 되어 2002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006년에는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권경도는 2018년 9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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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2) 제62호 좌수영어방놀이 김태롱
    김태롱(金泰瓏)은 1933년 10월 19일[실제 출생은 1932년] 부산의 수영구 망미동 구락마을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양계장을 운영했던 할머니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때 공부도, 운동도 곧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부친인 김해 김씨 진수는 젊었을 때 수영에서 장구를 잘 치기로 유명했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장구를 잘 잡지 않으셨다. 김태롱은 장구를 맨 부친을 딱 한 번 봤을 뿐이라고 한다. 정월만 되면 수영의 마을 곳곳에서는 지신밟기가 성황을 이루었고, 이때 들리는 꽹과리, 장구, 북 소리는 그에게 익숙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20대에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였다. 친구 따라 겨울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크게 없던 시절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장구였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함석장구로 동네 형님이었던 도태일로부터 사사했다. 학생 시절부터 워낙 풍류를 즐겼던 김태롱은 장구 배우는 속도가 남달랐다. 수영에서 쇠를 잘 치기로 아주 이름났던 안명룡에게 가끔씩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장구를 치기 시작하면서 부터 몸과 마음이 아픈 것도, 세상의 고달픔도 잊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큰 위안이 되었다. 장단 치는 사람이 귀한 시절이었던 1970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하였다. 김태롱의 재능과 실력을 알고 있던 이사장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 지역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전승 민속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지역민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했던 김태롱은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한 후에 주어지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내곤 하였다. 처음 맡은 역할은 수영야류 제대각시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 연희자가 전무했기 때문에 여성스러운 춤사위가 가능한 인물로 낙점된 것이다. 수영야류는 1971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다음해인 1972년 좌수영어방놀이가 복원되면서부터 김태롱은 장구 치는 악사를 맡기 시작하였다. 장구잽이로서는 수영 지역에서 정평이 나 있었기에 가장 적격자였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고, 197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좌수영어방놀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어로요를 중심으로 고기잡이의 전 과정을 재현한 좌수영어방놀이는 수영 지역에서 최초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태롱은 수영 지역 무형문화재의 현장 어디든 함께했었다. 수영야류에서 약 40년 가까이 장구를 쳤고, 좌수영어방놀이가 복원된 이후부터 꾸준하게 악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헌신과 기여는 2002년에 좌수영어방놀이 보유자로 인정되기에 충분하였다. 장구를 치면서 한바탕 땀 흘리고 나면, 어느새 세상의 고단함이 사라지는 즐거움을 맛본 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지역의 후배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고 싶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열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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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1) 제83-2호 이리향제줄풍류 김규수
    김규수(金虯洙)는1924년 음력 10월 16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김종대와 회진 임씨 사이에서 출생하여 소산리에서 성장했다. 김규수의 집안은 그가 1년의 절반 이상을 풍류를 즐기면서 돌아다닐만 할 정도의 재력을 보유했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의 민간예술 현장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김규수에 의하면 전라도의 명인들은 양반댁 사랑방에서 겨울철을 지내면서 풍류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풍류회를 이끌었다고 한다. 김규수의 사랑방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인 익산 출신 신쾌동의 수제자, 금하 김병두가 수차례 묵었기에 그에게서 신쾌동 가락 거문고 풍류를 배울 수 있었다. 이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였던 정읍 출신의 김윤덕도 김규수의 집에 묵으면서 음악 교류를 했고, 승주 출신의 판소리 명창 공대일, 부안 출신의 판소리 명창 홍정택 등과도 음악 교류가 있었다. 또한 젊은 시절에 여류 명창 김소희, 그리고 임방울 등의 판소리 공연을 봤던 기억이 있다. 김규수는 젊어서 사돈인 변일초에게서 평시조, 사설시조, 지름시조를 배웠다. 김규수가 시조를 배우던 무렵 부안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석암 정경태가 시조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다. 김규수는 38세에 그보다 십여 세 위의 전석동에게서 가야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전석동에게서 약 2년 정도 가야금을 배운 이후, 거문고 명인 김병두를 주산면 집에 모셔서 거문고 풍류와 산조를 익혔다. 김규수는 1972년 창립한 이리정악원의 창립회원이다. 이리정악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리향제줄풍류는 1985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3-2호로 지정되었다. 김규수는 1989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3-2호 이리향제줄풍류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다. 2003년에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