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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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4) 제82-3호 위도띠뱃놀이 김상원
    김상원(金相元)은 1933년 7월 1일에 부친 김장옥과 모친 강양임 사이에서 4남 2녀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국민학교를 마치고 16살에 영광 법성포에 있는 법성실업고등중학교에 입학했다. 예전부터 위도와 법성포는 교류가 많던 곳이어서 그곳 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지인의 소개로 법성포에 하숙집을 구해 생활했다. 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위도로 돌아간 뒤 학업을 중단했다. 전쟁기의 위도는 육지만큼 혼란스럽지 않은 상태였고 장남이기도 해서 19살에 집안에서 주선한 두 살 연하의 신부 신정염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이듬해에 큰 딸을 낳고 3년 후에는 큰 아들을 낳았으며, 총 6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23세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대구에서 군생활을 했다. 제대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다가, 지인이 운영하던 전주 이서면 농장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29세에는 부모의 집에서 독립해서 3칸짜리 집을 새로 지었으며 30대에는 배를 새로 짓고 낭장망 어업을 했다. 김상원이 띠뱃놀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춘천에서 있었던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부터였다. 당시 조금례 무녀가 굿을 하고 그가 징을 쳤는데, 위도띠뱃놀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비중 있는 역할로 자리잡게 되었다. 위도띠뱃놀이는 1985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상원은 1988년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고, 1995년에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김상원은 중학교 유학 시절, 군입대, 전주 농장에서 일하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위도에서 살았다. 그는 고향에서 살면서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나 민속놀이를 주민들과 공유하며 전승해 왔다. 또한 무속에 관심이 많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무녀들이 굿을 할 때 장구 반주를 하기도 했으며, 특히 원당제를 모실 때에는 주민 중에서 소질이 있는 사람이 무녀의 굿 반주를 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역할을 숙지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위도의 전통적인 생업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전통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 위도띠뱃놀이 전수교육조교에 이어 보유자가 되면서 관련 예능을 정리해서 기록을 남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축문을 비롯해서 조금례 무녀를 통해 파악한 무가 사설을 정리해서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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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3) 제68호 밀양백중놀이 권경도
    권경도(權慶道)는 1920년 음력 5월 25일 안동 권씨와 월성 이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밀양시 내이동 ‘동가리 신작로’라 불렸던 곳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어머니께서는 고된 시집살이를 하신 터라 딸을 엄혹하게 키운 반면, 아버지는 권경도를 무척 귀여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권경도를 업고 밀양장에 데려 갔다. 그때 마침 지동이란 곳에 살던 난쟁이가 걸어갔는데, 옆구리에 낀 삿갓이 땅에 끌릴 정도로 키가 작았다. 이 광경을 본 권경도는 ‘지동 난쟁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아장아장 걷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난쟁이를 따라 흉내낼 만큼 신명과 해학이 넘쳐났다. 작은 오빠인 권재업은 밀양에서 북 치는 가락이 좋기로 소문이 났고, 춤도 아주 잘 추던 사람이었다. 권경도보다 앞서 밀양백중놀이 전신인 오삼친목계 일원이기도 하였다. 권경도는 스무 살에 결혼했지만, 남편이 일찍 떠나갔다. 이내 찾아온 고달팠던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이라곤 ‘곡깨이’(익살)를 부리면서 남을 즐겁게 해주는 정도였다. 1960~70년대는 동네 야유회가 빈번하게 있었다. 영남루 근처 솔밭에서 야유회 하면서 권경도가 곱사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오빠 권재업이 한국국악협회 밀양지부 회원으로 가입시키게 되면서 밀양백중놀이와 본격적인 연을 맺게 되었다. 권경도는 한국국악협회 밀양지부 회원으로 가입해서 처음에는 곱사춤을 추었다가 난쟁이춤으로 종목을 바꾸었다. 1980년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준비를 하기 위해 회원들은 공설운동장에 모여서 3개월 동안 아주 열심히 하였다. 이 해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제주도에서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공연 연습하던 중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간 일도 있었다. 긴장과 피로가 겹친 탓이었다. 몸이 몹시 힘들었지만 회원들과 함께 고생한 성과를 봐야 하기에 공연은 무사히 마쳤다. 회원들은 오랜 연습과 노력을 했기 때문에 밀양백중놀이가 1등을 하리라 예상했지만, 기대에 못 미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회원들은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제주도에서 삼베를 떠서 밀양백중놀이 깃발을 만들었다. 보존회에서는 그 깃발을 아직 사용하고 있다. 밀양백중놀이 병신춤은 종류가 열 가지나 된다. 난쟁이, 중풍쟁이, 배불뚝이, 꼬부랑할미, 떨떨이, 문둥이, 곱사, 히줄래기, 봉사, 절름발이춤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난쟁이춤은 가슴과 날개 죽지를 열어젖히고 어깨를 올려서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어서 추는 춤이다. 권경도는 익살과 해학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밀양백중놀이를 지원하는 일이 많았다. 전수회관을 짓기 위해 전국으로 다니면서 공연도 했었고, 보존회에서 요청하는 공연소품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탁월한 춤 기량에다가 밀양백중놀이를 향한 열정이 바탕이 되어 2002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았고, 2006년에는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권경도는 2018년 9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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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2) 제62호 좌수영어방놀이 김태롱
    김태롱(金泰瓏)은 1933년 10월 19일[실제 출생은 1932년] 부산의 수영구 망미동 구락마을에서 10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양계장을 운영했던 할머니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유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릴 때 공부도, 운동도 곧잘 하는 모범생이었다. 부친인 김해 김씨 진수는 젊었을 때 수영에서 장구를 잘 치기로 유명했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장구를 잘 잡지 않으셨다. 김태롱은 장구를 맨 부친을 딱 한 번 봤을 뿐이라고 한다. 정월만 되면 수영의 마을 곳곳에서는 지신밟기가 성황을 이루었고, 이때 들리는 꽹과리, 장구, 북 소리는 그에게 익숙한 이끌림으로 다가왔다. 20대에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하였다. 친구 따라 겨울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크게 다친 일이 있었다.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크게 없던 시절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것이 장구였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함석장구로 동네 형님이었던 도태일로부터 사사했다. 학생 시절부터 워낙 풍류를 즐겼던 김태롱은 장구 배우는 속도가 남달랐다. 수영에서 쇠를 잘 치기로 아주 이름났던 안명룡에게 가끔씩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다. 장구를 치기 시작하면서 부터 몸과 마음이 아픈 것도, 세상의 고달픔도 잊기 시작하였다. 그야말로 큰 위안이 되었다. 장단 치는 사람이 귀한 시절이었던 1970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하였다. 김태롱의 재능과 실력을 알고 있던 이사장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영 지역에서는 1970년대 초반에 전승 민속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 지역민들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던 시절이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했던 김태롱은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한 후에 주어지는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내곤 하였다. 처음 맡은 역할은 수영야류 제대각시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 연희자가 전무했기 때문에 여성스러운 춤사위가 가능한 인물로 낙점된 것이다. 수영야류는 1971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다음해인 1972년 좌수영어방놀이가 복원되면서부터 김태롱은 장구 치는 악사를 맡기 시작하였다. 장구잽이로서는 수영 지역에서 정평이 나 있었기에 가장 적격자였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고, 197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좌수영어방놀이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이었다. 어로요를 중심으로 고기잡이의 전 과정을 재현한 좌수영어방놀이는 수영 지역에서 최초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김태롱은 수영 지역 무형문화재의 현장 어디든 함께했었다. 수영야류에서 약 40년 가까이 장구를 쳤고, 좌수영어방놀이가 복원된 이후부터 꾸준하게 악사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이러한 헌신과 기여는 2002년에 좌수영어방놀이 보유자로 인정되기에 충분하였다. 장구를 치면서 한바탕 땀 흘리고 나면, 어느새 세상의 고단함이 사라지는 즐거움을 맛본 것만으로도 의미 있었다. 지역의 후배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주고 싶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장구를 가르치고 싶어 하는 열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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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31) 제83-2호 이리향제줄풍류 김규수
    김규수(金虯洙)는1924년 음력 10월 16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내요리에서 김종대와 회진 임씨 사이에서 출생하여 소산리에서 성장했다. 김규수의 집안은 그가 1년의 절반 이상을 풍류를 즐기면서 돌아다닐만 할 정도의 재력을 보유했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의 민간예술 현장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할 수 있었다. 김규수에 의하면 전라도의 명인들은 양반댁 사랑방에서 겨울철을 지내면서 풍류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풍류회를 이끌었다고 한다. 김규수의 사랑방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보유자인 익산 출신 신쾌동의 수제자, 금하 김병두가 수차례 묵었기에 그에게서 신쾌동 가락 거문고 풍류를 배울 수 있었다. 이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였던 정읍 출신의 김윤덕도 김규수의 집에 묵으면서 음악 교류를 했고, 승주 출신의 판소리 명창 공대일, 부안 출신의 판소리 명창 홍정택 등과도 음악 교류가 있었다. 또한 젊은 시절에 여류 명창 김소희, 그리고 임방울 등의 판소리 공연을 봤던 기억이 있다. 김규수는 젊어서 사돈인 변일초에게서 평시조, 사설시조, 지름시조를 배웠다. 김규수가 시조를 배우던 무렵 부안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 석암 정경태가 시조로 이름을 날리던 때였다. 김규수는 38세에 그보다 십여 세 위의 전석동에게서 가야금을 배우면서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전석동에게서 약 2년 정도 가야금을 배운 이후, 거문고 명인 김병두를 주산면 집에 모셔서 거문고 풍류와 산조를 익혔다. 김규수는 1972년 창립한 이리정악원의 창립회원이다. 이리정악원을 중심으로 하는 이리향제줄풍류는 1985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3-2호로 지정되었다. 김규수는 1989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83-2호 이리향제줄풍류 전수교육조교로 인정되었다. 2003년에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2014년에는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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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구술자 전승 자서전(030) 제81호 진도다시래기 강준섭
    강준섭(姜俊燮)은 1933년에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에서 아버지 강보문과 어머니 박색화 사이의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윗대 어른들은 대대로 음악 활동에 종사해 왔으며, 부모는 임회면 일대에 당골판을 갖고 있었다. 강씨 가계의 인맥은 직계 가족만이 아니라 외가, 처가, 사돈 등으로 얽혀 있다. 진도씻김굿 명인이었던 박병천 집안을 비롯해서 진도의 이름난 예인들과 직간접적으로 대부분 연결돼 있다. 강준섭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며 살았다. 부모형제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창에 밝았으므로 저절로 음악을 익힐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리 공부를 한 것은 같은 마을에 살던 신치선 명창을 통해서였다. 당시 신치선과 같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고 소리를 잘했으므로 자주 다니면서 듣고 배웠다고 한다. 강준섭은 15세 되던 해에 외지로 나가서 극단 활동에 참여했다. 그가 처음 가입한 단체는 ‘여성창극단’이었다. 18세에 군입대를 했다. 이듬해에 총상을 입고 명예제대를 했으나 공연 활동에 지장이 없어서 곧바로 공연 무대에 다시 섰다. 이후 줄곧 유랑극단 활동을 해왔다. 그가 참여한 단체 숫자가 20여 개 이상이라고 하므로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다단한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 중에서 분기점이 된 시기는 진도다시래기가 복원되고 새롭게 주목받던 1980년대 초다. 그는 당시 다시래기 복원을 주도하던 이들의 요청을 받고 진도다시래기팀에 합류했다. 1985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 보유자(거사)로 인정되었으며, 이후 다시래기를 대표하는 연희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는 근래까지도 국내외 여러 무대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아 연기를 했으며, 세한대학교 전통연희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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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29) 제43호 수영야류 태덕수
    태덕수(太德守)는 1929년 4월 9일 부산시 수영구에서 아버지 태명준과 어머니 이학매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수영에는 해군사령부가 있었고, 마을 이름은 ‘강계진’이었으며, 그 마을에 몇 없는 기와집에서 자랐다. 그의 형제자매는 그를 포함하여 4남 2녀로 사이가 좋았다. 6살 무렵(1934년) 이북에 있었던 외삼촌을 따라 가족이 이북 함경북도 무산군 삼사면으로 이사를 간다. 이사 가던 해에 그곳에 있던 유평소학교에 입학하였고, 학업을 이어 간다. 1945년 17살 되던 해 당시 경쟁률이 높고 들어가기 어려웠던 경성공립농업합교에 입학하였지만 해방으로 인하여 2년 만에 학업을 접게 된다. 해방 이듬해 태덕수와 가족들은 요릿집을 운영해서 번 돈을 가지고 고향인 수영으로 월남한다. 수영에서 머물던 그는 19세에 부산 동래 수영출장소 호적계에 임시직으로 근무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년 후 정식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 태덕수는 1951년 23세의 나이에 이모의 소개로 만나게 된 감천동에 사는 정귀남과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수영에서 차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태덕수는 20년 정도 공무원 생활을 하다 1969년 퇴직하였다. 그리고 그해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보유자였던 아버지 태명준의 영향을 받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에 입회하였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성격이 쾌활하고, 손재주가 뛰어나 못하는 게 없었으며 수영야류에 열심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43세에(1971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하였으며 후에 3,4,6대도 도맡았다. 그는 사무국장 일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영야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아버지가 그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그쯤 생계를 위해 열었던 포구나무 식당은 번성하여 집 형편에 신경 쓰지 않고 보존회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다. 그는 1974년 수영야류 전수장학생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정대윤 씨의 양계장에서 연습하는 등 수영야류에 열중하였다. 그는 1976년 수영야류 이수자가 되었으며, 1989년 12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보유자(수양반)로 인정되었다. 나아가 그는 1999년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2010년까지 역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수영의 문화재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여 6권의 책을 펴내기도 하였으며, 전수회관을 짓는 등 수영야류 전승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노고를 인정받아 2004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12년 84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43호 명예보유자로 인정되었고, 2014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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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28) 제39호 처용무 김용
    김용은 1933년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서 부친 김응진과 모친 한인호 사이에서 1남 2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김용이 18세가 되는 해 6·25 전쟁이 일어나고, 김용은 7월 15일 1기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다. 참전 11개월 만에 상이군인이 되어 1951년 5월 마산 제839부대 제5차 명예상이제대자로 경주로 돌아온다. 이 시기의 김용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입을 벌리지 못해서 말을 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하여 신체적·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경주 동도국악원에서 노기들에게 시조와 국악기[거문고·가야금] 등을 배우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교육 방식은 구전심수 방식이어서 김용은 체계적인 교육에 목말랐고,서울에서는 악보를 보면서 체계적으로 교육을 한다는 정경태(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보유자)의 말을 듣고, 서울로 상경할 결심을 한다. 서울 국립국악원에 와 보니, 60여 종의 국악기와 각종 국악문헌 그리고 정간악보와 한문으로 된 여러 고전 자료들이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는 김용은 7년간의 경주 동도국악원 생활을 접고, 30대인 1960년대 새롭게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2년도에 종무처에서 일반 공무원시험인 ‘제11회 사무계 1부 국악직 4급 공무원 전형’이 있어서 응시한 결과 김용은 운 좋게 ‘국악과 이론’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일반인으로서 최초의 국립국악원 국악사가 되었다. 국악사가 된 이후 김용은 본격적으로 국악의 발전을 위한 행정업무를 담당하면서 왕실의 문화예술을 선양하기 위해 국내외 순회공연과 국악자료 발간 등을 추진하였다. 열정적으로 일을 한 결과, 1971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보유자로 인정되었고, 1973년 국립국악원 장악과장으로 승진을 한다. 김용은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장악과장,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악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립국악원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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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구술자 전승 자서전(027) 제15호 북청사자놀음 이근화선
    이근화선(李根花善)은 1925년 4월 23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안곡 평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긴 것은 ‘오래 살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 주셨다. 평촌마을에는 예부터 정월 대보름이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을 비는 사자놀이 행사를 하였다. 마을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고 마을 발전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던 사자놀이는 이근화선이 살았던 토성마을에서 주관하였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이근화선은 5세 때[1928년] 양반 역을 맡았던 오빠 무동에 우연히 올라탄 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 전까지 사자놀이에 참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조카의 중매로 5살 차이가 나는 남편과 18세에 약혼을 하고, 21세에 결혼을 하면서 고향과도 사자놀음과도 이별을 고했다. 6·25 전쟁이 나자 피난 도중에 남편과 헤어진 이근화선은 이불 속에 패물과 돈을 숨겨 자식을 데리고 간신히 부산으로 와 힘든 생활을 견디며 남편을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3년간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상경한 이근화선은 남편 친척이 운영하던 남편의 가게를 회수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된다. 사업을 하며 바쁘게 살면서도 주만현·이소혜·김근희 무용학원에서 무용을, 조순자에게 가야금을 배우며 어릴 적 좋아하였던 예능적 소질을 살려 삶을 지탱해 나가던 어느 날, 이북5도청 사람들이 찾아와 북청사자놀이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근화선은 합류하기로 마음을 잡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임한다.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사람을 끌어 모으고, 무용학원을 인수하여 연습장소로 제공하고 시장에서 천을 떠 와 의상과 사자탈을 제작하는데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작품의 완성을 위해 사자놀이 외 옛 평촌마을에서 추었던 거사춤·사당춤·애원성·승무·칼춤 등을 복원하고 대사도 다시 다듬었다. 궁극적으로는 북청 지역의 사자놀이를 문화재로 지정 받기 위해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후원금을 모아 북청사자놀이 단체를 결성하였고, 활성화를 위해 1965년 남산 야외음악당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다닌것을 시작으로 70세 후반까지 노구를 이끌며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였고, 이스탄불·이란·러시아·일본 등 전세계로 해외 공연을 다니며 북청사자놀이를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이근화선과 북청사자놀이 단체의 그간의 활동이 인정되어 1967년에 북청사자놀음이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 받았고, 이근화선은 1970년 47세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5호 북청사자놀음의 사당춤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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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구술자 전승 자서전(026) 제12호 진주검무 정금순
    정금순(鄭今順)은 1930년 1월 2일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에서 태어났다. 정금순은 3녀 중 셋째 딸로서 아들을 기대했던 집안의 바람과 달리 딸로 탄생하였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정금순은 11살 되는 무렵 진주로 이사를 온다. 진주에서는 가정집에서 카바레 춤인 사교춤을 교습하였는데, 정금순도 사람을 모아 대학생에게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정금순은 남강 카바레에서 춤을 잘추는 사람으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탱고를 잘 추었다고 한다. 이런 정금순을 진주검무에 끌어들인 것이 보배 엄마이다. 보배 엄마는 정금순 집 근처에 사는 사람으로 진주검무에서 전수생을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정금순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하였다. 정금순은 1967년 진주검무에 입문한다. 정금순은 처음에 진주권번 출신의 선생인 강귀례와 김자진에게서 교습을 받았는데, 김자진에게 검무, 강귀례에게는 승무와 장기춤을 배웠다. 정금순은 진주검무에 입문한지 10년 만인 1977년 진주검무 이수자가 되었다. 이후 많은 공연활동과 전수활동을 하였는데, 진주 삼현여자고등학교와 진주교육대학교 학생들에게 진주검무를 전수하였다. 정금순은 1985년 진주검무 전수교육조교가 되었고, 본격적으로 진주민속예술보존회에서 춤 선생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진주검무 보유자인 이음전이 타계하면서 2001년 진주검무 보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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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025) 제11-6호 구례잔수농악 김용현
    김용현(金龍鉉)은 1927년 4월 25일 전라남도 구례군 신월리 잔수마을(현 신촌마을)에서 김재일과 정야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본래 1929년생이지만, 어려서 죽은 형의 호적을 그대로 승계받아서 1927년생으로 호적에 올랐다. 그는 경주 김씨 수은공파 36대손이다. 어릴 적에는 할아버지께서 지어준 김대진(金大鎭)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의 할아버지가 남원에서 잔수마을로 이주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농악패의 수북잽이이자 수벅구이고, 소리도 잘해서 마을 상여꾼의 선소리꾼이기도 했다. 잔수마을에서는 예전부터 농악이 전승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정월 초사흗날에 당산제만굿은 늘 거행했다. 잔수마을에는 섣달 그믐날 밤에 당산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신 중앙 당산에서 제사를 지내기에 ‘제만굿’이라고 한다고 한다. 이어 정월 초사흗날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에 오당산이 있어 각 당산에서 당산제만굿을 치고, 마당밟이도 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에 마을에서 줄다리기도 했다. 줄다리기는 동서로 나누어 하는데, 동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 달집태우기를 하는데, 달집에는 곪은 종기 상처를 닦은 헌옷 등을 넣는다. 정월 열나흗날 밤에 어린이들은 쥐불놀이를 했다. 4월 초파일에는 남원 춘향제를 구경 갔고, 5월 단오에는 전주 대사습놀이를 구경 갔다.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추석에는 씨름을 하는데, 김용현은 젊어서 씨름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7월에 만두레를 할 때는 장원놀이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한 이는 동청에서 덕석말이 등의 벌을 주었다. 잔수마을 걸궁패는 인근에 유명해서 여수와 순천 등지로 마당밟이를 다녔다. 인근으로 마당밟이를 다니기 위해 마을의 당산제만굿을 초사흗날에 거행하게 되었다. 걸궁패의 잽이로 김용현의 위로 서학현과 이성옥의 상쇠 계보가 전해지고, 설장구는 허용이었다. 이외에 걸궁패에 김영환, 김상옥, 강판열, 서정규, 황갑주, 박삼룡, 심장열, 김홍열, 강동열, 김재일, 윤용택, 정기택, 나도근 등이 있었다. 서학현은 김용현의 처외삼촌으로서, 김용현은 그에게서 꽹과리를 배웠다. 마을의 수북이자 수벅구였던 김용현의 아버지가 광양에서 전립질을 배워 와서 마을 농악패에 가르쳤다. 김용현은 어려서부터 걸궁패가 마당밟이를 할 때 깡통을 주워 꽝쇠(꽹과리)처럼 치면서 쫓아다니곤 했다. 이를 유심히 본 걸궁패 상쇠인 이성옥의 권유로 꽝쇠를 치기 시작했다. 이성옥을 따라 순천 등지에 마당밟이를 하러 다녔다. 이후에 초대 상쇠였던 서학현에게 12채굿을 전부 배웠다. 순천에 걸궁을 하러 가게 되면 보통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성옥 외에 서국천, 심상현, 김재수, 박삼룡 등이함께 다녔다. 곡우 때에는 화엄사에서 남악제를 거행했는데, 면 대항 농악대회가 있어서 잔수마을은 거의 매년 참가했고 상을 받았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미신타파’라는 미명하에 순천에 마당밟이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고, 남악제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마을의 당산제만굿은 새마을운동의 와중에도 계속 거행했다. 김용현이 상쇠가 된 이후에는 수장구인 심서구 등과 광주로 걸궁을 다녔다. 2008년 이후 몇 차례의 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를 받고, 2010년에 구례잔수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구례잔수농악이 보유자가 없는 단체 종목으로 지정되었지만, 김용현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보존회장으로 구례잔수농악의 전승과 보급을 위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구례잔수농악은 다른 문화재 지정 종목 농악들과는 달리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세시를 맞아 농악을 치는 마을굿 전통을 간직한 유산이다. 전통문화의 건강한 전승을 위하여 구례잔수농악은 모범적인 문화재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승의 중심에 상쇠인 김용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