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음원자료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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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음원자료시리즈 08> 양소운 배뱅이굿
2016-01-16
배뱅이굿은 남도의 판소리에 견주어 서도의 판소리라 일컬어진다. 남도의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창자가 소리와 아니리와 발림을 엮어 극을 주도해 나가나, 배뱅이굿에는 소리를 받아주는 다수의 뒷소리꾼과 극적 장면 진행을 받쳐주는 상여와 꽹가리, 고깔, 무구(巫具) 등 다양한 소품까지 등장하여 볼거리도 풍부한 음악극이라는 인상을 준다. 판소리가 남도 소리조에 바탕을 두고 짜여져 있는 데 비해 배뱅이굿은 서도소리가 주가 되면서도 여러 지방의 무가와 민요, 판소리까지 수용하고 있어 소리꾼의 기량이 크게 좌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배뱅이굿은 1850년대 중반 평안남도 용강 태생인 김관준(金寬俊)이라는 서도명창이 만들어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작사자가 도산 안창호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유야담(於于野談)>에 가짜 무당이 등장하여 재물을 빼앗는 '동윤(洞允)'설화가 전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서사무가 '당금애기'에도 배뱅이와 상좌중의 사랑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 둘이 접합되어 배뱅이굿이 탄생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배뱅이굿은 김관준으로부터 전하는 평안도제가 주종을 이루어 왔다. 김관준은 그의 아들인 김종조를 비롯하여 최순경, 김칠성, 김주호, 이인수 등의 제자에게 배뱅이굿을 전했으며, 김종조는 장수길, 김용훈, 김경복 등의 제자를 두었고, 김칠성은 김정연에게, 이인수는 이은관에게 배뱅이굿을 전했다. 이 밖에 황해도 배뱅이굿의 창자로 문창규의 이름이 전하며 문창규의 배뱅이굿을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이가 양소운이다. 그동안 배뱅이굿은 해방 이후 이은관(1917- )이 크게 활동을 하여 1984년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이은관의 바디가 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은관에 못지 않은 창자로 양소운이 있음이 알려져 있던 터에 그의 배뱅이굿이 음반으로 나오게 됨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양소운의 배뱅이굿을 더 이상 무대에서 접하기 어려운 오늘날 1972년도 공연실황을 담은 이 음반은 배뱅이굿의 형성과정에 대한 단초를 제공할 것이며 평안도제와 황해도제의 배뱅이굿을 비교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될 것이다. 이 자료는 1976년 4월 16일 국립극장에서 황해도민속예술보존협회의 무형문화재조사연구 종합발표공연으로 이루어진 <황해도 민요>의 무대에 올려져 녹음된 것이다. 당시의 공연내용 중 배뱅이굿을 제외한 자료가 지난 해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자료 시리즈(3) [황해도 민요]의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에 배뱅이굿만을 따로 떼어 독집으로 내게 되었다. 당시 공연에서 양소운은 주최측의 요청에 따라 축약해서 부른 관계로 완창임에도 상좌중이 등장하는 대목이 제외되어 있다. 박동신(1909-1991)이 장고를 잡았고 뒤소리는 황해도민속예술보존협회의 여러분들이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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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음원자료시리즈 09> 장사훈 거문고 정악
2016-01-16
이왕직 아악부의 거문고 정악을 남겨준 장사훈(張師勛, 호 : 云初, 1916∼1991)은 거문고의 명인이었고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20세기 중반이후 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됨에 따라 연주·교육·이론 등 전 분야에 걸쳐 국악계는 많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장사훈은 올곧게 계승받은 정악을 바탕으로 1936년부터 1943년까지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로서 8년간 연주 활동을 하였고 1961년부터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초창기 대학 국악 교육을 정착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으며 문학박사로서 33권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156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국악교육 연구회 회장, 예술원회원,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1,519회의 방송 및 강좌, 342편의 논평(논설·수상포함)을 발표하여 국악전반에 걸쳐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이에 방송문화상, 국악진흥회 공로상, 5月문예상, 외솔상, 노산문학상, 세종문화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아카데미상 등을 수상하였고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받았다. 장사훈은 1916년 경북 영주시 이산면 운문리에서 인동장씨(仁同張氏) 장해문(張海文)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조부에게 4∼5년간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서울 공립 청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에 4기생으로 입학하였다. 20세기 초기까지 궁정악사는 세습적 교육체재 속에서 계승되어 왔으나 1919년에 王立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를 설립하여 아악생을 공모 선발하고 1924년 이후로는 졸업한 아악생들을 아악수로 임명하여 악사 등용의 문을 개방하였다. 아악부원 양성소는 학과와 음악교육을 병행 이수시켰는데 전공은 거문고, 가야금, 피리, 대금, 해금 중에서 선택하게 하였으며 종묘악, 문묘악, 일무, 악장, 여민락, 여민락영, 여민락만, 보허자, 낙양춘, 정읍, 영산회상, 평조회상, 별곡, 취타, 가곡, 아악이론, 악기사용법 등 정악 전반에 걸쳐 폭넓은 수업을 병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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