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향사

전체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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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암서원
2016-04-22
흥암서원은 서인의 대표적인 학자 동춘당(東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제향하는 서원으로, 조선 후기 남인의 본거지인 영남에 건립된 노론계 서원입니다. 17세기 중반 이후 노론정권은 영남 내 노론세력의 활동공간으로서 서원 건립과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영남지역 곳곳에 서인 혹은 노론계 서원이 건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흥암서원은 이러한 정치·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건립되어 영남 내 노론세력 확대를 위한 거점 역할을 한 노론계 서원의 본산입니다. 흥암서원은 동춘당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702년(숙종 28) 창건되어 1705년(숙종 31) 사액된 서원으로 영남학파의 본 고장에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이 배향된 유일한 서원입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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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절사
2016-04-22
현절사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하고, 항전하자고 주장하다가 청나라 심양에 끌려가 순절한 화포 홍익한·임계 윤집·추담 오달제인 삼학사(三學士)를 모시고 그들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후에 청음 김상헌과 동계 정온을 추가로 배향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사우(祠宇)는 선현의 영정이나 신주를 봉행하는 장소로 서원과 달리 강학의 기능이 없습니다. 삼학사의 정표를 세우는 포상은 병자호란 이후 오랜기간 행해지지 못하다가 40여년이 지난 1681년(숙종7)에 이르러서야 지평 매암 조지겸과 교리 포암 이사명이 남한산성 내에 홍익한·윤집·오달제를 배향한 사우를 세우고 아울러 제향할 것을 청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의 청에 따라 사우의 이름을 '현절'이라 짓고, 1693년(숙종19)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이후 현절사는 1711년(숙종37)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였습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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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2016-04-22
필암서원은 많은 시문과 저술을 남기고 '하서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오늘날 호남서예의 주류를 형성한 하서 김인후를 모신 서원입니다. 무성서원과 함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전라지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서원이자, 호남의병의 주료 거점지이기도 합니다. 향사에서는 진설은 1보 1궤, 4변 4두로 하고, 전폐례를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향교석전에 준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행례 동선에 있어서도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동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는 서문을 나와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 필암서원 향사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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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서원
2016-04-22
파산서원은 1568년(선조1) 이이의 주창으로 청송서원으로 창건되어 성수침을 배향하여 오던 중 1592년(선조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모두 전소되었습니다. 이후 1611년(광해3)에 이정구·정엽·영천 신응거·추탄 오윤겸·추포 황신 등 5인의 발의로 재건하였으며, 1628년(인조6) 성혼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1650년(효종1) 백홍우의 상소로 파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이후 1683년(숙종9) 백인걸을 추가 배향하였고, 1681년(숙종20) 성혼을 복향한 이유로 2차 사액받았습니다. 1740년(영조16) 성수종을 추가 배향하며 모두 4위를 모시고 오늘날까지 제향을 지내고 있습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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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
2016-04-22
자운서원은 1615년(광해7)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1)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당시 이이가 배향된 서원은 모두 22개소에 이르렀지만 황해도 배천의 문회서원만 남고 모두 훼철되었습니다. 1907년 파주지방 유림에서 서원의 터에서 자운단을 복원하여 춘추로 향사를 봉행하여 오다가 1969년 사당을 다시 복원한 이후 1974년부터는 추향사만을 봉행하고 춘향사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38년만에 중단된 춘향사를 다시 부활시켜 지금은 춘추로 향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자운서원의 배향인물은 이이를 주향으로 하고 김장생과 박세채를 배향으로 봉행한 기호학파의 으뜸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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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저서원
2016-04-22
우저서원은 선조 때 문신이자 학자인 의병장 중봉 조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되었으며, 1670년(현종11)에서 1671년 사이로 추측됩니다. 우저서원이 창건된 후 21년이 지난 1670년에서야 사액을 받은 것은 서원 난립에 따른 폐단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사액을 받지 못하였다가, 조선 현종 대에 두 학파간 극단적인 이념논쟁의 하나로 서원건립이 집중되면서 서원이 수가 증가하는데, 이러한 가운데 우저서원의 사액이 이루어 진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에서 우저서원의 건립과 사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김포유림들은 꾸준히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습니다. *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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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2016-04-22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주 유림들은 당시 영남학파를 대표하고 있던 정구와 장현광 등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이언적의 학통을 계승했고, 경주권내 수원(首院)으로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 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으며, 서원은 1572년(선조5)에 건립되고 같은해 사액되었습니다. 옥산서원의 향사는 다른 서원의 모범이 될 정도로 오랜 전통과 분위기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모든 서원시설이 제 자리에 있어 동선의 혼란 없이 과거부터 행해오던 그대로를 이어왔다는 느낌을 줍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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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
2016-04-22
심곡서원은 중종연간 사림파의 영수로 활동하며 개혁을 추진하다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은 정암 조광조의 뜻을 기리는 곳입니다. 조광조 부친의 묘소 아래 시묘살이 하던 곳에 1605년(선조38) 사당이 건립된 후 1650년(효종1) 사액되었습니다. 현재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에 위치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심곡서원 향사는 다른 서원향사와 비교하여 다음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당일 향사일에 입재를 하기 때문에 제수준비에 있어서 제관들이 참여하는 성생례라든지, 서원에 출입하는 제관들이 향사에 앞서 사당에서 알묘하는 알묘례 및 제관을 분정하는 분정례등의 의식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 심곡서원의 행례동선은 '동입서출'의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세번째로 주향위와 배향위에 각각 통돼지 한 마리를 올립니다.네번째로 음복수조례 후에는 현관만 재배하고, 철변두 후에 현관 이하 재배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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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2016-04-22
소수서원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위치하는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이며, 최초의 사액 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36) 7월 주세붕이 풍기에 군수로 부임한 후 1543년(중종38)에 평소에 흠모하던 회헌 안향의 사당과 유생의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백운동서원이 국가의 인정을 받아 정착하게 된 것은 퇴계 이황에 의해서였으며, 명종은 1550년 백운동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내렸습니다. 소수서원에는 총 네사람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수입한 회헌(晦軒 安珦)과 그의 재종손으로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안축(安軸)과 안보(安輔), 마지막으로 소수서원을 처음 건립하였던 주세붕입니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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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
2016-04-22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있는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입니다. 서원에는 사우(祠宇)인 존덕사가 있어 그와 그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있습니다. 병산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입니다. 병산서원 향사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춘추향사의 현관 및 주요 집사는 서원의 인사위원회에서 선임한다. 둘째, 향사시간은 종래 자정을 지나 축시(丑)에 거행되어 왔으나, 서원재단에서 설립한 풍산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참례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에 향사지내는 것으로 변경하여 봉행하고 있다. 셋째, 향사시 묘우의 출입은 제관들은 '동입동출(東入東出)'의 예를 따르고 있다. 넷째, 제물봉치의 의례가 엄숙자게 잘 전승되어 오고 있다. 다섯째, 서원향사 의례에서 다른 서원에서는 일반적으로 관학인 석전과 마찬가지로 신위께 폐백을 예물로 몰리는 전폐례를 행하는데, 병산서원에 향사에는 전폐례가 없다. *서원(書院)은 지역별 학문 전통 기반 위에 설립되었던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학문 발전과 지역 여론을 형성하던 곳입니다. 서원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조선 유학전통을 확립하는데 토대가 되었습니다.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배출하며, 지역 실정에 맞게 제정한 향약을 통해 풍속을 교화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성장하여 중앙에 맞서는 지역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서원은 서원에 모신 인물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징성을 유지하고, 사회교육을 통해 한문학을 전파하는 등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문화를 간직한 요람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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